朱正善
2020-08-03 16:30:33 출처:cri
편집:朱正善

쌀라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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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라족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그 민족언어는 쌀라어로 알타이어계 돌궐어족에 속하며 일부 학자들은 살루르방언에 속한다고도 주장한다. 쌀라족은 본 민족의 문자가 없고 한문을 통용한다.

쌀라족은 “쌀라르”라고 자칭한다. 이들은 주로 청해성순화(靑海省循化)쌀라족자치현, 화륭(化隆)회족자치현 감도향(甘都鄕), 감숙성 적석산(甘肅省積石山) 보안족둥샹족쌀라족자치현의 대하가(大河家) 등 지역에 집거한다. 2010년의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로 보면 쌀라족의 총 인구는 13만여명이었다.

쌀라족의 주요한 신앙은 이슬람교이며 이들의 역사발전과 정치, 경제, 문화 등 분야에서 이슬람교가 큰 영향을 미친다.

쌀라라는 명칭은 기원 7세기 서돌궐시대 우구스부의 쌀루르부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쌀루르를 “쌀로르” 혹은 “싸루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는 우구스칸의 여섯 아들 중에서 다섯째인 타크의 맏아들이며 싸루르는 “도처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자”라는 뜻이다.

한문의 기록에서는 쌀라족에 대한 명칭을 10여종으로 기록했는데 대부분은 “쌀라르”와 “쌀라”의 서로 다른 번역이었다. 그중에는 “쌀라”, “싸라” 등이 있다. 쌀라족과 이웃해 살고 있는 티베트족, 한족, 회족인들은 이들을 “쌀라”라고 부르며 투족은 “쌀러쿤”이라 부른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후 이들의 정식 명칭을 “쌀라족”으로 정했다.

쌀라족의 민족기원에 대해 민간과 학계에는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다. 그 하나는 이들이 터키에서 왔다는 것이고 또 하미에서 왔다는 설, 사마르칸드에서 왔다는 설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일치한 의견은 쌀라족이 중아시아의 사마르칸드에서 왔다는 주장이다. 최근 년간 일부 역사학자들은 쌀라족의 조상들이 중아시아 사마르칸드 일대에서 이주해왔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들의 조상인 뛰러망, 아하망의 무덤과 “코란경”필사본은 지금까지도 청해의 청진사에 보존되어 있다. 터키문으로 된 “회족내원고찰”이라는 책에는 “쌀라크에 거주하던 뛰러망과 아하망 형제가 본 민족의 170여가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이주해 서녕(西寧)부근에서 정착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민족습관으로 볼 때 과거 쌀라인들은 결혼식때 “낙타무”를 추거나 “낙타극”을 공연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선민들이 중아시아의 사마르칸드로부터 이주해온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쌀라족의 조상들은 순화에 와서 정착을 했고 이들은 티베트족, 회족, 한족, 몽골족들과 장기적으로 섞여살면서 하나의 안정된 민족공동체인 쌀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쌀라족의 조상들은 원나라 때 사마르칸드에서 이주해 중국 경내에 들어왔다. 원나라 정부는 그 수령인 뛰러망을 적석주의 세습 “다루가치”로 임명했다. 그후 뛰러망의 손자인 한보(韓寶)가 명나라 홍무(洪武) 3년(1370)에 명나라에 귀순했고 3년후에는 맥석주 천호소(千戶所)의 세습백호(世襲百戶)라는 관직을 받았으며 이로써 토사(土司)제도가 정식 확립되었다. 한보는 쌀라족역사에서 초대 토사이며 그 자손들이 토사직을 이어갔다. 그후 정통(正統) 원년(1436년)에 한귀(韓貴)가 전공을 세워 부천호(副千戶)직을 제수받았고 양주(凉州)에 가서 방어임무를 맡았다. 청나라 때에는 명나라의 제도를 답습했고 지방관리를 위임했으며 이를 외위토사(外委土司)라 불렀다. 

청나라 중후반에 쌀라족은 종교억압과 봉건압박을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여러번 일으켰다. 건륭(乾隆) 46년(1781년)에 쌀라족인 소사십삼과 한이를 주축으로 한 반청봉기가 일어났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쌀라족내부의 신교와 구교의 다툼이었다. 그러나 그 깊은 사회배경은 청나라 봉건통지자들과 쌀라족토사, 종교인 등의 잔혹한 억압으로 인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보편화되고 심각해진 결과였다. 봉건경제의 발전과 함께 경작지는 토사와 호장, 이슬람교 사원의 종교인원 등 소수봉건상층계층의 손에 대량으로 집중되었다. 종교인원들이 사원의 토지와 재산을 장악하고 대대로 물려주면서 이들은 지주계급으로 상승했고 부동한 교파와 지주들간의 모순이 늘어나면서 쌀라족은 도탄속에 빠졌다. 청나라 조정은 구교를 지지하고 신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실행했는데 이는 쌀라족을 분화시키려는 정책이었고 토사 등 세력을 돕는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구교 신도들을 포함한 쌀라인들이 반청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청나라 동치(同治)년간과 광서(光緖) 21년에도 쌀라족은 두차례의 반청봉기를 일으켰다.

그후에도 쌀라족은 태평천국운동, 서북회족인들의 반청봉기와 항일전쟁, 해방전쟁에 적극 참여했고 자신들만의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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